[낙상사고 투병기 335]
빼빼로 데이에 화산암 꼭대기
해국 꽃에 청띠제비나비가 앉았다.
이런 기막힌 인연의 조우는 멋진 추억이어라
제주살이를 몇년동안 하고있으나
제주에 흔하디 흔한 해국의 모습을
나답게 담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디 진하다.
그런데 낙상사고까지 당하고 나자
점점 멀어져가는 해국의 아쉬움이었다.
11월이 되어서야 "이크!" 해국을 봐야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늦게서야 해안으로 달리는 마음에 기대감은 별로 없었다.
역시나 봐둔 곳은 해국의 말라버린 꽃대였다.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해국과의 조우 이것이 끝인가
허탈감에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데
커다란 화산암 위에 해국이 반짝인다.
그런데 어떻게 올라가지?
수술다리의 철심과 꽃 욕심이 갈등하는 사이
내 눈은 벌써 올라갈 곳을 찾고 있었다.
반대 쪽에서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보였다.
화산암의 날카로운 이빨 덕에 꼭 잡으면 괜찮겠지.
조심 조심 진땀을 흘리며 올라갔다.
섭섬 배경으로 볼 수 있는 해국은 벌써 시들고 있었다.
문섬 쪽을 바라보니 덜 시든 해국이 보인다.
포인트를 정하고 문섬을 배경으로 구도를 잡는다.
수술 다리를 구부릴 수 없어서 좀 더 멀리 자리를 잡고 옆으로 눕다시피 했다.
화산암의 이빨이 몸을 쑤시는 아픔을 참아야 한다.
그러면서 문섬과 해국이 보이도록 하고 촛점을 맞추는 순간
청띠제비나비가 날아와 촛점을 맞추지 않은 해국에 앉는 것이 아닌가.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서 나와
도감에는 10월까지 출현한다는 네가
11월 중순에 해국 꽃에 나타나다니
잠시 생각하면서 문섬 배경이 아닌 청띠제비나비를 찍는다.
그런데 청띠제비나비가 날아올라 문섬 배경의 해국에 앉는다.
순간 셧터를 누르고 또 누르려 하였지만 이미 나비는 날아가버렸다.
뷰파인더를 확인하니 해국과 청띠제비나비가 있었다.
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는가
오늘이 빼빼로 데이인데 이런 선물을 받다니
젊은 시절 빼빼로 데이에 선물받은 쵸코렛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래 멋진 추억이었어, 오늘 청띠제비나비도 해국과 함께 세팅된 멋진 추억이 되리라
인연은 추억을 만들며 순간을 아름답게 색칠해준다.
오늘의 인연을 만들어준 내 수술 다리야
험한 바위섬에 올라가주어 고맙구나
해국과의 아쉬움이 대반전을 일으키며 내 삶에 강렬하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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