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살이

이끼 이야기 - 0.4% 확율이 눈에 띤 뿔이끼, 아는 것은 본능이다.

풀잎피리 2025. 2. 1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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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좋아하기 전 민물고기 취미를 가졌었다.
민물고기 어항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이끼 청소였다.
매주 일요일마다 물을 갈고 유리나 모래에 낀 이끼를 제거했다.
 
성남의 남한산성을 바라보길 수 십 년
소나무 밑동에 이끼가 사라지고 있었다.
공해에 찌든 소나무에서 이끼가 버틸 재간이 없었나 보다.
 
이끼 만화에서 이끼는 음습하고 조용히 숨어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이끼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은퇴 후 제주살이 중 낙상사고가 나서야 갑자기 내 눈에 띄었다.
 

탐라뿔이끼(anthoceros angustus)


재활하면서 조금씩 걷기 시작할 때
이끼 중 0.4%에 해당하는 뿔이끼가 보였다.
무소의 뿔처럼 힘차게 돌진하라는 메시지 같았다.
 
수많은 이끼 중 가장 보기 힘든 뿔이끼가 어떻게 눈에 보였을까?
시력이 나빠질 때로 나빠져 교정시력조차 변변치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다른 뿔이끼를 발견했다.
 
어렵게 만난 2종의 뿔이끼의 이름을 찾으려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이끼 목록의 뿔이끼 학명을 모두 검색하여
외국 사이트에서 이름을 찾았다.
 
탐라뿔이끼와 제주뿔이끼, 열공해서 얻은 이름이다.
이것을 계기로 이끼 세상에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재활하며 많은 응원을 받았다.
 

월드컵경기장 걷기운동

 
눈보라를 헤치며 재활할 때
이끼와 반야심경을 연결하여 소리치며 걷고 걸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이끼의 생태가 반야심경의 연기(緣起)와 닮았다.
 
낙상사고도 내 삶의 인연이듯
이끼 또한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취미의 세계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발견한 이끼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너구리꼬리이끼, 다시마이끼, 두루미이끼, 금털이끼, 게발이끼, 깎지이끼...
탐라우산이끼, 방울우산이끼, 털우산이끼, 패랭이우산이끼...
엷은잎우산대이끼, 가는물우산대이끼, 나무이끼, 큰꽃송이이끼...
 
이름을 불러주면 특별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발견했을 때보다 이름을 알았을 때 더 기쁜 이유이다.
이끼의 이름과 생태를 알고자 외국의 사이트를 훑는 시간이 즐겁다.
 
나의 이끼탐사는 현미경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이끼를 주로 찾는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우산이끼 종류나 뿔이끼 종류이다.
그런데 이 두 부류가 이끼 중 가장 어렵다는 아일러니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는 것은 본능이다"

 
제주살이 중 "이끼와 함께"를 읽다가 똥이끼가 있다는 알았다.
똥이끼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문구가 나를 일깨운다.
"아는 것은 본능이다." 내 머리를 깨는 도끼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가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이끼에 빠진다는 것은 본능인 것이다. 
끌리는 것에 빠져보는 내가 드디어 이유를  알았다.
 

splachnum ampullaceum (출처 / 구굴 검색 이미지)

 
일본의 어느 블로거는 똥이끼를 발견한 것을 "보물을 발견했다"라고 썼다.
흰꼬리사슴이 똥을 싸면 이끼 포자가 싹이 트고 하룻밤 사이에 삭이 올라온단다.
똥이 부패하기 전에 빨리 자손을 만들려고 삭은 아름답기 그지없단다.
 
진흙뻘에 연꽃이 피듯, 똥이끼도 까다로운 서식처에서 기발하고 절박한 번식을 한다.
이 희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발견한 것이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똥이끼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꿈이라도 꾸고 싶다.
 
사슴은 사라졌지만 노루가 살고 있으니 허무맹랑한 꿈은 아닐 수 있다.
내가 만일 제주에서 똥이끼를 발견했다면 "백록이끼"라고 이름 지어 주고 싶었다.
만약 통영에서 발견한다면 "이순신이끼"로 할까? ㅎㅎ

 
자연의 상대로 상상하며 웃는 나 자신이 본능에 충실한 삶이라 믿는다.
힘들어지는 몸을 지탱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을 찾는 나의 방법
고사리면 어떻고 이끼면 어떠랴?
 
이끼들은 원시시대에 식물이 육지를 처음으로 정복하던 시간으로 나를 안내한다.
이끼들이 물을 떠난 육지에서 살아남으려는 절박함을 진화로 극복했듯이
나 또한 재활과 노화가 겹친 어려움을 생태 취미를 버팀 삼아 극복해보고 싶다.

 

이름을 안 기쁨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이끼야
제주의 계곡이 그립다, 이끼야
사랑할 테니 나타나다오, 이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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