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제 잠시 실수로 공개했던 나의 금털이끼 넋두리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통영의 해안산책길에서 숨 가쁘게 쏟아낸 말은 다듬지 못한 거친 문장과 음성 입력한 불안전한 발음이 그대로 입력된 날 것의 횡설수설 암호 같은 글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 민망해 얼른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네 분의 '좋아요' 클릭과 한 분의 따뜻한 혜안 댓글이 어지러운 글을 '사랑'으로 완성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밤새 그 당혹스러움을 붙잡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공개된 것은 마취된 산모의 배위에 새겨진 의사의 제왕절개 메스 자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마취에서 깨어난 산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안는 심정으로 금털이끼를 주제로 한 나의 보라색 사유를 다시 꺼내어 놓습니다." |

금털이끼, 그 보랏빛 산고(産苦)에 대하여
제주 숲 절벽 위에서 잉태한
금털이끼에 대한 불온하고도 뜨거운 단상들
꺼내놓지 못해 속으로만 문드러지던 문장들이
통영 해안길 재활의 발걸음마다 헉헉거리며 차오른다
그제, 나도 모르게 세상에 던져진
그 뜻밖의 공개 사건은
결국 나를 살리려 달려든 의사의 날카로운 메스였던가
마취된 산모의 배 위에 그어진 붉은 선처럼
의지도 모른 채 열려버린 부끄러운 살갗 너머로
유산(流産)될 뻔한 나의 진실이
비로소 세상의 첫 빛을 본다
자괴감의 마취가 풀리고 마주한 흉터
그것은 외설이라는 구설수를 뚫고 태어난
가장 정직한 생명의 훈장
나무 줄기 사이, 기지 않고 바짝 선 저 이끼처럼
나도 이제 헉헉거리는 절규를 멈추고
메스 자국 선명한 자화상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보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찢기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나의 가장 깊은 보라색 고해성사를

큰괴불이끼 글을 쓰던 날, 나는 '시(詩)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길인 줄 알았으나, 시인과 작가에게 그 둘은 전혀 다른 갈래였다. 사실이 차가운 '카메라'라면, 진실은 뜨거운 '자화상'이라는 비유를 가슴에 새겼다. 문득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난 뒤, 그가 한국 방문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작가는 금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에는 그 말의 무게를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금기'야말로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작가의 그 용기를 빌려, 오늘 한라산에서 마주한 '금털이끼'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꺼내어 놓으려 한다.

뽕잎피나무 꽃을 찍으려 절벽 위로 늘어진 줄기에 다가갔을 때였다. 갈라진 나무 줄기 사이로 거뭇한 털 뭉치가 보였다. 순간, 아찔했다. 어느 화가가 그려낼 법한 에로스적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신윤복의 풍속화 속에서 남녀의 밀회를 엿보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적나라한 자연의 모습 앞에서 야한 생각을 품은 내 머릿속 한구석엔 창피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왜 이끼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을까.' 현실로 돌아와 위험하지 않은 줄기에 붙은 이끼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삭모(삭을 덮는 모자) 위로 털이 났고, 이끼는 땅을 기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집에 돌아와 공부하며 알게 된 녀석의 이름은 '금털이끼'. 이름이 참 묘하고도 직관적이다. 삭모에 털이 나서 붙여진 이름일 터다. '삭모(蒴帽)'란 결국 삭(蒴)을 보호하는 모자가 아닌가. 고사리로 치면 포자낭군을 보호하는 '포막'이며, 인간으로 치면 갓 태어난 아기를 보호하는 '배내옷'이다. 그렇게 생각의 물길을 돌리자 나무 사이 금털이끼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랑이 사이처럼 깊게 패인 그곳의 검은 털은 부끄러운 감춤이 아니라, 생명이 움트고 나오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도깨비쇠고비의 잎을 보며 느꼈던 그 경이로운 생명력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것을 '모정'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나는 '야함'이라는 잣대를 먼저 들이댔을까. 이 글은 그 금기를 깨고 생명의 숭고함으로 승화시키려는 나의 짧은 헌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또 다른 생각이 나를 흔든다. 나는 금털이끼를 처음 마주했을 때, 왜 혜원의 풍속화 속 호기심 어린아이를 먼저 떠올렸을까. 엿보는 눈길로 금털을 관찰하던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실과 외설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는 지금, 차가운 카메라 앞에 서서 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론의 낚시성 헤드라인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 한구석에 외설의 잔상을 담아두지는 않았던가.
다시금 쿠르베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나무 줄기 사이의 금털이끼를 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자화상이 설령 일그러졌을지라도, 나는 오늘 금털이끼를 통해 생명의 민낯을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금털이끼 / 삭모(蒴帽)의 배내옷
절벽 위 뽕잎피나무 줄기 사이
은밀하게 숨어든 까만 털의 기척
혜원의 풍속화 속 아이가 되어
나는 훔쳐보듯 생의 틈입을 목격했다
카메라는 차갑게 흑백의 사실을 찍고
나의 눈은 뜨겁게 붉은 외설을 읽는다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는 찰나
기지 않고 꼿꼿이 선 금털이끼의 직설(直說)
아, 그것은 털이 아니라
어린 생명을 감싸 안은 배내옷이었구나
태초의 어둠을 닮은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모정(母情)이라는 이름을 배웠다
흔들리는 것은 이끼가 아니라 나의 눈동자
외설과 진실 사이, 그 아슬한 경계에서
나는 오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닦아내고
생명의 원천 앞에 낮은 헌사를 바친다
오르한 파묵의 용기를 빌려
귀스타프 쿠르베의 말을 빌려
세상의 기원이라는 금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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